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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켈란젤로 : 르네상스 시대 예술의 거장 - AI.NERDGOM >

안녕하세요. 너드곰입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미켈란젤로 : 르네상스 시대 예술의 거장"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시대를 초월한 예술가 미켈란젤로의 본래 이름은 '미켈란젤로 디 로도비코 부오나로티 시모니'입니다. 그는 1475년에 태어나 이탈리아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 시인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예술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는 미켈란젤로의 작품들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이름이 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생애

소년 시절

미켈란젤로는 토스카나 지방의 카프레세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귀족 출신으로 카프레세의 치안판사였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가 태어날 때 어머니는 병으로 병상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그는 유모의 보호 아래에서 자라게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편협하고 외골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 그림 해설 문제로 공방 친구와 싸워 코뼈가 주저앉는 상처를 입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자신의 외모에 대한 열등감을 더욱 느끼게 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유모의 남편은 석공이었기 때문에, 그의 집에서는 돌과 망치를 장난감 삼아 자라났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예술에 대한 관심은 어렸을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3세 때 그는 가족과 함께 피렌체로 이사하였고,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공방에서 3년간 견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1년이 지나자 그곳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하여 다른 곳으로 떠나야 했습니다.

피렌체에서 미켈란젤로는 로렌초 데 메디치의 후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메디치 가문이 세운 조각학교에 입학하여 조각에 전념할 수 있었으며, 메디치 가문이 소장하고 있던 고대 로마시대의 조각품들로부터 큰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1494년에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공하여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이 몰락하면서 미켈란젤로의 인생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전쟁을 피해 베네치아와 볼로냐를 거쳐 약 1년 동안 조반 프란체스코 알도브란디의 후원을 받으며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주요 활동 장소는 피렌체와 로마였습니다.

 

< 미켈란젤로 : 르네상스 시대 예술의 거장 >

노년 시절

1546년에 71세인 미켈란젤로는 교황 바오로 3세의 지시를 받아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축 공사 책임자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1550년에는 바티칸 파울리나 예배당에 "사도 바오로의 개종"과 "성 베드로의 순교"라는 벽화를 그렸으며, 성 베드로 대성당 돔, 피렌체 성당의 피에타, 팔레스티나의 피에타, 론다니니의 피에타 등을 제작하면서 많은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그는 또한 로마를 건축학적으로 세계의 중심지로 만들기 위한 기념사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캄피돌리오 광장과 성 베드로 대성당의 둥근 지붕은 아직도 로마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입니다. 그는 이러한 프로젝트들을 직접 완성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계획에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완성되었습니다.

노년의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신앙과 부족함을 많은 시로 표현하게 되었습니다. 89세인 1564년 2월 18일에 뇌출혈로 숨을 거두기 전에, 그는 임종식을 집행하는 추기경 살비아티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내가 나의 영혼의 구원을 위해 충분히 행하지 못한 점과 내 직업에서 알파벳을 겨우 배우기 시작할 때 죽게 되어 유감합니다." 그의 장례식은 원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치러질 예정이었지만, 그의 조카가 피렌체에서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여 로마와 피렌체 사이에서 그의 시신을 놓고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혼란 끝에 장례식은 22일이나 지나서야 그의 고향인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 성당에서 엄정하게 거행되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대표작

피에타 (조각상)

1499년에 미켈란젤로는 로마에서 "피에타"라는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피에타"는 이탈리아어로 '슬픔'이나 '비탄'을 의미하며, 이 작품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성모 마리아의 비애를 표현하는 주제입니다.

 

<  피에타, 1498~1499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


"피에타"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대리석 덩어리에서 두 인물을 조각해내야 했기 때문에 매우 복잡한 작업이었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두 인물을 하나의 응축된 덩어리로 표현하여 인상적인 효과를 자아내었습니다. 이 작품은 예수의 죽음에 대한 마리아의 비애와 애도를 깊이 감정적으로 전달하며, 미켈란젤로의 조각 기술과 예술적 감각을 대표하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피에타"는 그의 명성을 더욱 확고히 하였으며, 그 후로도 미켈란젤로는 다양한 예술 작품을 창작하며 예술적으로 성장해 나갔습니다. 이 작품은 그의 예술적 업적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하고 있습니다.

다비드 (조각상)

1501년에 피렌체에서 공화정이 수립되고 정국이 안정되자,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로 돌아와서 시의 위탁으로 "다비드"의 제작에 착수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약 5m 길이의 대리석은 이전에 다른 조각가가 작품 제작을 포기한 후 약 40년간 방치되어 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3년여에 걸쳐 4m 높이의 "다비드"상을 완성시켰는데, 이 작품은 완벽한 인간성을 대변하며 르네상스 정신을 잘 반영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정치적 목적에 따라 베키오 궁전 앞 시뇨리아 광장에 설치되었습니다. 피렌체의 시 당국은 "다비드" 모습을 통해 골리앗을 쓰러뜨리기 직전의 다윗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 다비드, 1501~1504년, 피렌체 갤러리아 델 아카데미아 >

 

"피에타"와 "다비드"를 통해 미켈란젤로는 거물적인 예술가로 인정받게 되었고, 유럽 각지에서 작품 의뢰가 밀려들었습니다. 그는 예술가로서 자유와 독립성을 인정받았으며, 작품을 선택하고 해석하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권력자들로부터 작품을 명예의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압력을 받았고, 이로 인해 고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를 괴롭히면서 동시에 그의 명성을 높여주었습니다.

1505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소환하여 자신의 영묘 장식을 맡기기로 주문했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제때에 제작비를 지불하지 않았고, 미켈란젤로는 교황의 관심이 브라만테와의 관계 때문에 멀어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교황의 변심에 대한 불만과 함께 자신을 해칠지도 모르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미켈란젤로는 로마를 떠나 피렌체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교황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고, 피렌체의 지도자인 피에르 소데리니에게 그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피렌체를 침공한다고 협박했습니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볼로냐에서 율리우스 2세를 찾아가 동상을 제작해야 했고, 이 동상은 나중에 프랑스의 루이 12세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 (천지창조)

1508년에 교황은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부르고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 장식을 명령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평소 조각가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천장화 작업을 맡기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는 심지어 라파엘로에게 이 작업을 맡기는 것도 제안했지만, 교황은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  시스티나 천장화, 1508~1512년, 프레스코,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

 

교황이 미켈란젤로에게 천장화를 맡긴 이유에는 브라만테라는 인물과의 앙숙이 있었습니다. 브라만테는 미켈란젤로가 벽화를 그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실패하면 자신에게 이득이 돌아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는 미켈란젤로가 베드로 성당 내부 공사에 참여하도록 하였는데, 미켈란젤로는 처음에는 완강히 거절했지만 교황의 요구로 인해 두 가지 조건을 수락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자유롭게 천장화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림이 완성될 때까지 아무도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조건이 수락되었고, 그 결과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를 비롯한 경쟁자들의 콧대를 꺾을 작품으로 탄생한 것이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화입니다.

미켈란젤로는 구약성서의 9개 주제로 800 제곱미터에 이르는 거대한 천장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제자들이 도움을 주지 않고 혼자서 천장화를 그렸으며, 높은 비계 위에서 작업하는 것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는 석회 가루로 인해 시력이 손상되고 등이 굽어지는 신체적 고통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작업은 진척되지 않았고 보수도 제때에 받지 못하며 교황과의 갈등도 있었지만, 그는 1508년 5월 10일에 작업을 시작하여 1512년 10월 30일에 완성하였습니다.

천장화가 완성되면서 미켈란젤로는 그의 천재성에 대한 찬사를 받았습니다. 천장화에는 총 343명의 인물이 등장했습니다. 이 천장화, 즉 "천지창조"는 미켈란젤로를 37세의 나이에 당시 최고의 화가로 인정받게 만들었습니다.

천장화 완성 이후, 미켈란젤로는 교황 율리우스의 묘소 작업에 다시 착수했습니다. 그는 시스티나 예배당 천장화의 예언자들과 유사한 "모세상"을 조각하였는데, 이 작품을 통해 육중함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세부 묘사를 더욱 풍부하게 표현하는 기술을 터득했습니다.

그러나 1513년에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사망하면서 묘소 작업을 위한 자금이 대부분 삭감되었습니다. 이후 로렌초 데 메디치의 아들인 교황 레오 10세의 지시에 따라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로 돌아가고 메디치 가문과의 작업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메디치 저택의 개조 및 산로렌초 교회의 개조를 위한 건축설계를 수행했으며, 메디치 가문의 묘소를 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527년 로마가 정복당하면서 교황 클레멘스가 도망가자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에 항거하여 전통적인 공화국을 재건하였습니다. 그러나 저항세력은 패하고 1530년에 메디치 가문의 통치가 재개되었습니다. 이후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문과의 관계가 악화하여 메디치 가문의 묘소 작업을 미완성한 채로 피렌체를 영원히 떠나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최후의 심판 (시스티나 예배당 벽화)

1534년에 새 교황 바오로 3세는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예배당의 끝벽에 거대한 프레스코인 "최후의 심판"을 그리도록 주문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다음 해부터 혼자 작업을 시작하였고, 6년 후인 1541년에 391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그림을 완성하였습니다.

 

<  최후의 심판, 1534~1541년,  프레스코, 바티칸 시스티나 경당 >

 

그림이 거의 완성되었을 때, 바오로 3세는 비아지오 다 체세나라는 추기경과 함께 미켈란젤로의 작업실인 시스티나 예배당에 나타났습니다. 교황이 체세나 추기경에게 그림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 추기경은 그림이 너무 음란하여 볼 수 없다고 비판했습니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지옥의 맨 끝에 뱀이 몸을 감고 있는 당나귀 귀를 한 미노스의 얼굴에 체세나 추기경의 얼굴을 그려 넣었습니다. 이후 체세나 추기경은 그 그림을 보고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자신의 모습을 삭제해달라고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미켈란젤로의 후원자인 교황은 "천국이라면 몰라도 지옥은 나도 손을 쓸 방법이 없네"라고 거절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 벽화는 완성된 후에도 성스러운 바티칸에서 나체 그림을 그려 논란을 일으켰고, 미켈란젤로는 종교 재판에 회부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논란은 24년간 지속되었으며, 1564년에 교황 비오 4세는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부적절한 부분은 가려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고, 미켈란젤로의 제자인 볼테라에게 나체 부분을 가리도록 지시했습니다. 이로 인해 볼테라는 "브라게토네"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브라게토네는 기저귀를 채우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마치며

미켈란젤로의 삶과 작품은 시대를 초월하여 현대 예술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그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에게 놀라움과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성실하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물들이었고, 그의 작품들은 걸작이라고 할 만한 것들로 가득했습니다. 비록 키가 작았지만, 미켈란젤로는 예술가로서의 열정과 끈기로 많은 작품을 창작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버려진 대리석에서 "다비드"를 조각내고, 경쟁자의 함정을 이겨내며 "천지창조"를 완성하여 화가로서도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의 작품들이 걸작이었던 이유는 천재적인 재능뿐만 아니라 언제나 열악한 상황에서도 최선을 다해 노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성실한 노력의 결실이었습니다.

그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위해 싸우던 시대에 가톨릭교회의 중심인 교황청에서 예술가로서 엄중한 노동을 착취당하면서도 교황들과 추기경에 맞서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예술세계를 형성해 나갔습니다. 루터가 신학적인 쟁점으로 교황청에 맞섰다면, 미켈란젤로는 그림과 조각으로 맞섰던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숨기 전에 "알파벳을 겨우 배우기 시작한" 예술가로서의 고백을 남겼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큰 감동을 전해주었습니다. 우리는 그에게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작품과 열정은 영원히 우리 마음 속에 남을 것입니다.

FAQ

Q: 미켈란젤로가 가장 존경한 예술가는 누구였나요?
A: 미켈란젤로는 당시 많은 르네상스 예술가들과 교류했지만, 특히 그리스 고전 조각에 큰 존경심을 가졌습니다.

 

Q: 미켈란젤로의 작품 중 가장 접근하기 어려운 작품은 무엇인가요?
A: 그의 작품 중 '최후의 심판'은 복잡한 구성과 깊은 종교적 주제로 인해 접근하기 어렵게 여겨집니다.

 

Q: 미켈란젤로는 어떤 재료로 조각했나요?
A: 미켈란젤로는 주로 대리석을 사용하여 조각했습니다. 그의 조각은 세밀한 디테일과 정교한 마무리로 유명합니다.

 

Q: 미켈란젤로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은 무엇이었나요?
A: 그는 종교, 신화, 인간의 신체와 감정 등 다양한 소재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특히 인간의 신체에 대한 깊은 탐구가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Q: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는 장소는 어디인가요?
A: 이탈리아 피렌체의 아카데미아 미술관, 로마의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 등에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을 볼 수 있습니다.

 

이상 "미켈란젤로 : 르네상스 시대 예술의 거장"에 대한 포스팅이었습니다.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